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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

김금희 작가 '첫 여름, 완주'

by 45분점1 2025. 7. 25.

김금희 작가 첫 여름, 완주

김금희 작가는 매 작품마다 우리 곁에 숨 쉬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포착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의 온도’를 다루는 데 능한 소설가입니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첫 여름, 완주』는 무제 출판사의 ‘듣는 소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서사의 흐름 속 대사와 묘사는 더욱 명료하며 리듬감 있게 살아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갖는 진짜 매력은 ‘듣는 형식’ 그 자체보다, 여름의 질감과 사람들의 온기를 문장 안에 고요히 담아낸 점에 있습니다.

김금희 작가 '첫 여름, 완주'
김금희 작가 '첫 여름, 완주'

『첫 여름, 완주』는 한 인물의 실종을 계기로 시작되는 여정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삶에 고단함을 안고 전혀 다른 공간에 발을 디딘 손열매, 그리고 그녀가 머무르게 된 완주의 작은 마을. 이곳에서 열매는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이웃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는 이들과의 조우는 열매가 말의 기능을 잃은 상태에서도 교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려줍니다.

인물의 온도로 서사를 채우는 소설

이야기의 시작점은 다소 특별한 사정에서 비롯됩니다. 손열매는 돈을 빌리고 사라진 선배 고수미를 찾아 수미의 고향, 완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열매는 수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매점 겸 장의사에서 머물게 됩니다. 한여름의 완주에서 열매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태로 동네 사람들과 만나고, 점점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갑니다.

주변 인물들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청년 어저귀, 춤은 좋아하지만 슬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학생 한양미, 개 ‘샤넬’과 함께 사는 배우 정애라 등은 모두 기이하면서도 사실적인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이들은 삶의 결핍을 품고 있지만, 그 결핍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감싸 안고 있으며, 그 모습을 통해 독자는 일상의 복잡함과 감정의 농도를 함께 겪게 됩니다.

여름이라는 계절, 무너짐과 회복의 시간

김금희는 계절의 촉감, 공간의 냄새, 인물들의 침묵까지 언어로 섬세하게 직조합니다. 『첫 여름, 완주』는 단지 어떤 사건이나 갈등을 따라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끝없이 들여다보는 여정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에서 여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마치 인물들과 동반자처럼 그들의 변화와 함께 숨 쉬는 유기적 존재입니다. 여름의 공기 속에서 인물들은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용기를 모읍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감정의 응어리를 말리는 시간이고, 그렇게 스스로를 복원하는 계절입니다.

열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자신을 낯선 마을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말이 아닌 언어’를 배웁니다. 눈빛, 행동, 기척, 기다림 같은 비언어적 교류를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열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실된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대사와 리듬의 힘 — ‘듣는 소설’의 실험

이 작품의 또 다른 특별함은 ‘듣는 소설’이라는 실험적 형식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오디오북을 전제로 한 서술 방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 인물 간의 호흡,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까지도 모두 청각적 리듬을 고려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인물의 말투, 감정의 온도, 장면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저귀와 열매, 양미 사이의 대화는 짧고 리드미컬하면서도 그 안에 말하지 못한 것들까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말 너무 싫으니까”라는 단순한 대사가 품고 있는 감정의 깊이는 페이지 밖으로 튕겨 나오듯 생생합니다. 감정은 말을 통해 전달되지만, 동시에 그 말을 피해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이 소설은 보여줍니다.

문학, 공감, 그리고 여름의 빛

『첫 여름, 완주』는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도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기대고 살아가는지를 조용히 비추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목소리를 잃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휘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 어설픈 위로보다 더 강한 ‘묵묵한 곁에 있음’의 의미를 독자에게 상기시킵니다.

김금희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말할 수 없음’의 감정을 자주 다뤄왔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녹아들 수 있는지를 실험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실험은 여름이라는 계절의 밀도, 인물들의 침묵, 그리고 세심한 대사들로 구현됩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사계절을 다 경험한 듯한’ 감상을 남깁니다.

작가 김금희의 진화

2009년 「너의 도큐먼트」로 등단한 이래 김금희는 한국문학의 중요한 감정 서사를 책임지는 작가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등 이전 장편에서도 개인의 외로움과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로 독자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번 『첫 여름, 완주』는 그러한 김금희의 문학 세계를 한층 더 섬세하게 확장시킨 작품으로, 낯선 공간과 마주한 인물이 ‘돌봄’과 ‘공존’을 통해 새롭게 피어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특히 박정민 배우가 이끄는 출판사 무제의 첫 프로젝트로서도 의미가 깊으며, ‘듣는 소설’이라는 실험을 통해 한국문학의 새로운 감각을 제안하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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